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대개 눈앞의 태산이 아니다. 발밑에 놓인 작은 돌부리다. 태산은 멀리서부터 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누구나 경계한다. 돌아갈 것인지,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잠시 멈출 것인지 생각할 시간도 준다. 그러나 돌부리는 다르다. 작고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어느 순간 발목을 잡힌다.
세상사도 그렇다. 큰 실패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정도쯤이야” 하는 작은 방심에서 시작한다. 절차 하나쯤 건너뛰고, 약속 하나쯤 미뤄두고, 불편한 목소리 하나쯤 외면한다. 그때 별일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위험은 바로 그 지점에서 몸집을 키운다.
처음 선을 넘을 때는 사람도 주위를 살핀다. 두 번째는 조금 덜 살피고, 세 번째쯤 되면 그곳이 원래 길이었던 것처럼 걷는다. 잘못은 반복되면 관행이라는 이름을 얻고, 관행이 오래되면 어느새 권리처럼 행세한다. 처음에는 원칙을 어긴 사람이 나중에는 자신이 원칙인 줄 착각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자리와 권력에는 그런 묘한 마취제가 들어 있다. 사람들이 먼저 인사하고, 문이 먼저 열리고, 전화 한 통이면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그것이 자리의 힘인지 자신의 힘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주변의 박수가 오래 이어지면 박수받을 만해서 치는 것인지, 박수를 쳐야 하니 치는 것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조직이 만들어내는 칭찬은 달콤하다. 누군가 앞장서 치켜세우고, 뒤이어 몇 사람이 같은 장단을 맞추면 어느새 작은 잔칫상이 차려진다. 길가에는 축하 현수막이 펄럭이고, 온라인에는 비슷비슷한 응원이 줄을 잇는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꽃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그 풍경을 모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현수막이 많이 걸렸다고 민심이 많이 걸린 것도 아니고, 칭찬 글이 줄을 섰다고 시민의 마음까지 줄을 선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생각보다 오래 보고,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 다만 매번 나서서 말하지 않을 뿐이다.
현수막은 바람이 불면 펄럭인다. 조직이 만들어낸 응원도 신호가 떨어지면 요란해진다. 그러나 둘 다 뿌리는 없다. 길가 나무에 현수막을 아무리 단단히 묶어도 사람의 마음까지 묶어둘 수는 없고,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를 친다고 해서 평범한 연주가 명연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오는 박수가 있다. 관객은 대개 안다. 누가 먼저 손뼉을 쳤는지, 왜 갑자기 여기저기서 손바닥이 분주해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그런데 정작 무대 위에 있는 사람만 그 박수를 자신의 실력에 대한 갈채로 오해할 때가 있다. 권력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희극이기도 하다.
칭찬이 지나치면 오히려 칭찬받는 사람을 해친다. 된장찌개 한 그릇 내놓고 미슐랭 간판부터 걸어놓는다고 국물 맛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간판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잠시 붙잡을 수 있지만, 숟가락을 들어본 사람의 입맛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행정도 정치도 결국 마찬가지다. 포장보다 결과가 오래 남는다.
민심은 인쇄소에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수막 제작비를 더 쓴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조직의 사람 몇 명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생성되는 것도 아니다. 민심은 오히려 소리 없이 쌓인다. 잘한 일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잘못한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억해 둔다. 그리고 언젠가 판단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동안 묵혀둔 계산서를 꺼낸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비판보다 더 위험한 것이 과잉 칭찬일 수 있다. 비판은 적어도 정신을 깨우지만, 아첨은 현실을 가린다. 주변에서 모두 “잘하고 있다”고 하면 정말 그런 줄 알게 되고, 현수막이 줄지어 걸리면 민심까지 자기편으로 줄을 선 듯한 착각에 빠지기 쉽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는 순간 지도자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준 세상을 보게 된다.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반대 의견이 사라졌다고 해서 조직이 안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 충성이 들어서고, 충언이 사라진 자리에 아첨이 들어서면 겉으로는 조용해 보여도 속은 곪을 수 있다. 아무도 문제를 말하지 않는 조직이 반드시 문제가 없는 조직은 아니다.
‘천리지제 궤어의혈(千里之堤 潰於蟻穴)’이라 했다. 천 리나 되는 둑도 작은 개미구멍 하나 때문에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정작 무서운 것은 개미구멍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을 보고도 “별것 아니다”라며 지나친 사람의 태도다. 둑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만 균열은 오래전부터 시작됐을 수 있다.
큰일이 터지고 나면 사람들은 으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돌아보면 전조가 없었던 경우는 드물다. 누군가는 보았고, 누군가는 말했으며, 또 누군가는 괜한 소리를 한다며 귀찮아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는 말이 쌓이고 쌓인 끝에 정말 큰일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의 몰락도 그렇게 찾아온다. 거대한 잘못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오래전부터 작은 오만과 작은 무시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일 때가 많다. 사람을 함부로 대한 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사람을 멀리한 습관이 어느 날 한꺼번에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다.
자리라는 것도 그렇다. 가지 끝에 붙어 있을 때는 잎마다 높이가 다르다. 위에 달린 잎도 있고 아래에 달린 잎도 있으며, 햇볕을 더 받는 잎도 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떨어지고 나면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고엽이다. 땅에 떨어진 뒤 어느 잎이 높은 가지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사람은 없다.
시장도, 국장도, 사장도, 회장도 시간이 지나면 이름 앞에 ‘전(前)’이라는 글자 하나가 붙는다. 직함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잠시 맡겨진 역할이다. 그런데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의자의 높이를 자신의 키로 착각하는 사람이 생긴다.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컸던 것인지, 의자가 높았던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멀리 있는 태산보다 가까운 돌부리를 살펴야 한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보다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더 경계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보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박수는 기분을 좋게 하지만 때로는 발밑을 보지 못하게 한다.
현수막은 철거하면 끝난다. 동원된 박수도 손을 멈추면 사라진다. 하지만 시민의 기억은 그렇게 쉽게 철거되지 않는다. 조직이 만들어준 꽃길은 몇 걸음이면 끝나지만, 사람의 행적은 오래 남는다.
태산은 멀리서 보인다. 개미구멍은 발견하면 메울 수 있고, 돌부리도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피할 수 있다. 정작 사람이 끝내 피하지 못하는 돌부리는 따로 있다. 자신을 향한 박수를 민심으로 착각하고,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는 마음이다. 세상에서 적지 않은 몰락이 바로 그 작은 착각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참 묘하다. 사람은 남이 넘어질 때는 돌부리까지 정확하게 보면서, 정작 자신이 걷는 길에서는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