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따라 불렀던 이 노래는 단순한 동요가 아니다. 봉선화는 늘 울타리 아래, 담장 밑, 가장 낮은 자리에서 피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낮은 자리 때문에 봉선화는 이 땅의 서민을 닮았고, 평범한 시민의 삶을 닮았다. 그래서 오늘 이 노래를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단지 옛 추억 때문이 아니다. 지금 우리 지역의 현실이, 그리고 제천과 충북의 민심이, 마치 울 밑에 선 봉선화처럼 처량하게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천을 비롯한 충북의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거창한 구호와 달리 시민의 삶이 늘 뒷전으로 밀린다는 데 있다. 정치권은 시민을 위한다 말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민심은 금세 잊힌다. 행정은 지역발전을 외치지만 정작 시민이 체감하는 것은 불편과 답답함, 그리고 늦장 대응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지역경제는 활력을 잃고, 골목상권은 무너지고,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노인들은 더 팍팍해진 삶을 견딘다. 그런데도 지역 정치는 시민의 삶을 붙들 해법보다 세력 다툼과 자리 계산에 더 익숙해 보인다. 울 밑의 봉선화를 살피기보다 누가 화단의 주인이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형국이다.
제천의 현실만 봐도 그렇다. 지역은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 상권 위축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전통시장은 예전만 못하고, 도심 곳곳의 빈 점포는 늘어간다. 청년들은 제천에서 미래를 찾기 어렵다고 말하고, 자영업자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조차 버겁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행정과 정치가 보여주는 모습은 어떤가. 시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실질적 대책보다 보여주기식 사업과 홍보성 성과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시민의 삶을 지탱할 정책은 더디고, 예산은 늘 말 잔치 속에서 소비된다.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은 넘쳐나지만, 정작 시민의 삶은 왜 이토록 메말라 가는가.
행정의 무심함은 더 큰 문제다. 시민이 겪는 불편과 억울함 앞에서 행정은 종종 너무 늦거나, 너무 무디다. 민원은 길어지고 책임은 흐려지며, 잘못된 행정의 결과는 결국 시민이 떠안는다. 작은 불편 하나, 생활의 고통 하나를 가볍게 여기는 행정은 결코 시민을 위한 행정이 아니다. 지역의 공직사회가 진정 시민을 섬기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면, 시민의 삶은 지금처럼 쉽게 방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울 밑의 봉선화가 비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누군가는 멀찍이 서서 꽃이 왜 시드느냐고만 묻고 있는 셈이다.
정치의 책임은 더 무겁다. 지방정치는 시민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듬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민의 고통은 정책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지역의 위기는 선거 때만 소환되는 단골 메뉴가 되기 일쑤다. 주민을 위한 정치는 사라지고, 진영과 이해관계만 남는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봉선화처럼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시민들은 늘 참아왔고, 늘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 인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지역 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우리는 지금 봉선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봉선화는 추억의 꽃이기 전에 경고의 꽃이다. 낮은 곳의 삶이 무너지면 지역도 무너진다. 서민의 가계가 흔들리고, 자영업자의 한숨이 깊어지고, 청년이 떠나는 도시에는 그 어떤 화려한 개발 계획도 오래 버틸 수 없다. 시민이 행복하지 않은데 지역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삶이 나아지지 않는데 행정의 성과가 무슨 자랑이 될 수 있겠는가.
“울 밑에선 봉선화야.” 이 노래를 오늘 다시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낮은 곳의 삶을 먼저 살피라는 뜻이다. 지역 정치는 시민을 향해야 하고, 행정은 약자의 불편을 먼저 풀어야 하며, 공직은 주민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더 엄정해야 한다. 봉선화가 처량한 세상은 시민이 처량한 세상이고, 시민이 처량한 지역은 미래가 없다.
이제 제천도, 충북도 달라져야 한다. 요란한 구호보다 시민의 밥상부터 살피고, 전시성 사업보다 무너지는 골목경제부터 일으켜 세우며, 권력의 편의보다 주민의 상식을 먼저 세워야 한다. 울 밑에 핀 봉선화를 살피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사람도 살피지 못한다. 지금 우리 지역에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낮은 곳을 보는 눈이다. 봉선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결국 시민을 다시 본다는 뜻이다. 그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는 한, 제천의 내일도 충북의 미래도 결코 밝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