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관리위원회는 국민에게 공정한 선거를 약속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국민은 선관위를 믿고 투표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6·3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그 믿음에 적지 않은 균열을 남겼다.
선거 관리의 기본 중 기본인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지연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것도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된 서울시장 선거에서 말이다.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권자 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거나, 예측했음에도 대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선거 관리 기관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다.
더 황당한 것은 사태 발생 이후의 대응이었다.
현장 혼란이 커지는 동안 선관위는 국민을 안심시키기는커녕 상황을 따라가기에도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이 잘못됐고 누가 책임질 것인지, 재발 방지를 위해 무엇을 바꿀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위기를 수습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위기를 키운 셈이다.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투표용지 몇 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선거 관리의 기본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조직의 무능과 안일함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가 반복될 때마다 선관위가 보여주는 태도다. 사고가 터지면 사과보다 해명에 집중하고, 책임보다 절차를 앞세우며, 혁신보다 방어에 몰두한다. 그러는 사이 국민의 신뢰는 무너져 내렸다.
결국, 선관위는 스스로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고 말았다.
부정선거 주장은 수많은 검증과 판결을 통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돼 왔다. 그럼에도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신의 상당 부분은 선관위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있다. 허술한 선거 관리, 반복되는 실수, 부실한 위기 대응은 음모론자들에게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퍼뜨릴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음모론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선관위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실이 아닌 주장을 단호하게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선관위는 단 한 점의 의심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관리 능력을 보여줬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독립적 헌법기관이라는 지위는 정치 권력의 간섭을 막기 위한 장치이지 국민의 비판과 책임 추궁까지 차단하는 방패가 아니다. 오히려 독립성이 보장된 기관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전문성, 그리고 책임성을 요구받는다.
지금의 선관위는 어떠한가.
외부 견제는 약하고 내부 긴장감은 떨어졌다.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쇄신안도 찾아보기 어렵다. 독립성은 남았지만 책임성은 희미해졌고, 권한은 유지됐지만 신뢰는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실무 실수가 아니다. 오랜 기간 누적된 조직의 안일함과 폐쇄성이 드러난 결과다.
선관위는 더 이상 땜질식 처방으로 버틸 수 없다. 조직 운영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 인사 시스템, 선거 관리 체계, 감사 기능, 위기대응 매뉴얼까지 모두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조직 구조 자체를 뜯어고치는 대수술도 검토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선관위는 그 신뢰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국민이 선관위를 믿지 못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토대 역시 흔들린다.
지금 국민이 선관위에 요구하는 것은 해명이 아니다. 반성도 아니다.
근본적인 개혁이다.


















